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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단칼럼

    농업·농촌의 복지력 | 이병오  강원대학교 농업자원경제학과 교수 
    • 작성일2020/03/05 15:53
    • 조회 471
    농업·농촌의 복지력
    | 이병오  강원대학교 농업자원경제학과 교수 


    요즘 심신을 치유한다는 의미로 힐링(healing)이란 말을 많이 쓴다. ‘heal’의 어원인 ‘hal’은 ‘whole(전체적인)’이란 의미다. 건강을 뜻하는 ‘health’도 같은 어원에서 유래했다. 세계보건기구(WHO)에서 건강에 대해 내린 정의를 보면 ‘단지 질병이 없고 허약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육체적·정신적 사회복지(social well-being) 면에서 완전한 것을 나타낸다’라고 돼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치유란 인간이 원래 조물주가 만들어 준 균형잡힌 건강한 모습으로 되돌아가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조물주는 인간뿐만 아니라 대지와 자연질서도 애초에 ‘완전하고 건강한’ 모습으로 만들어 놓았다. 인간들은 자기 주변에 있는 나무나 풀에서 먹고 치료하고 생활하는 모든 재료를 얻어왔다. 체한 아이에게 어머니들은 쑥 뿌리를 갈아서 먹였고, 다친 곳에 나뭇잎을 으깨서 붙여줬다.

    최근 산나물이나 허브에서 우리 몸에 좋은 생리활성물질들을 많이 추출하고 있는데, 이는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예전부터 내려오는 신토불이(身土不二)나 약식동원(藥食同源)도 이런 통찰에서 나온 선현들의 가르침이다. 이처럼 자연은 마치 어머니의 품과 같이 모든 것을 따뜻하게 감싸주고 부족함 없이 제공한다.

    그런데 우리는 고도산업사회로의 압축성장을 거치면서 자연질서로부터 많이 이탈했고, ‘완전한 자연의 힘’을 잊은 채 살고 있다. 극심한 경쟁사회는 수많은 사람의 심신을 상하게 한다. 그들은 경우에 따라 낙오자로서의 상실감에 빠져 집에 쓸쓸히 있거나 병상에서 지낸다. 이들 대부분은 이미 많은 교육과 훈련을 받은 국가의 소중한 자원들이다. 이들이 심신의 원기를 회복해 학교나 산업사회로 돌아간다면, 자신은 물론 국가를 위해서도 얼마나 좋은 일인가.

    선진국들은 심신장애인들이 농업·농촌에서 일하고 생활하면서 심신을 치유해 다시 사회의 일원으로 보람차게 일할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이를 포괄적으로 그린케어(Green care), 또는 농업·농촌의 복지력이라고 부른다. 

    농촌에는 농림수산물과 같은 주 생산물뿐만 아니라 부산물, 농민들이 가진 전통기술, 무형문화, 역사, 자연경관 등 매우 다양한 자원들이 있다. 이러한 자원을 잘 활용해 시장수요에 맞게 개발하면 농촌다움을 살리면서 도시민들이 선호하는 차별화된 비즈니스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다. 이러한 사업은 개방화 시대에도 외풍을 덜 타면서 고령자나 여성 농업인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농촌의 주요 소득원이 될 수 있다.

    식품분야에서는 유기·친환경 농산물이나 농가 맛집이 있다. 녹차나 숯 성분을 의류 소재에 넣어 제품화하거나 건축자재·페인트에 가미시켜 활용할 수도 있다. 치유농업이나 식물·동물 테라피(요법)는 수요가 더욱 커질 것으로 전망된다. 그린투어리즘이나 푸드투어리즘, 삼림욕, 등산이나 사이클과 같은 야외활동은 이미 많이 익숙해져 있다. 농업 체험학습이나 자연관찰, 식생활 교육 등 교육적 기능도 로컬푸드의 확산과 더불어 중요성을 더해가고 있다. 이러한 기능을 촉진시키고 확대하려면 그린펀드도 도입돼야 한다.

    물론 현재도 다양한 형태로 이런 사업들이 전개되지만, 이들을 체계적으로 엮어 패키지화하고 생산주체간·지역간에 네트워크화하는 작업이 향후 주요 과제라고 할 수 있다. 최근 유럽에서는 농업 직불제를 보는 시각이 농업인에 대한 ‘보상’ 차원을 넘어 농업·농촌이 수행하는 다양한 공익적·복지적·공공재적 기능에 대한 ‘지불’ 성격으로 바뀌고 있다. 이런 차원에서 우리나라도 농업·농촌의 복지력을 더욱 강화하고 체계적으로 발전시켜 나가야 할 것이다.

    이 글은 농민신문 2013년 7월 8일자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