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보세 가보세,을미적 을미적,병신되면 못 가리” |김성훈 경실련 소비자정의 대표, 전 농림부장관
- 작성일2020/03/05 16:18
- 조회 555
“가보세 가보세,을미적 을미적,병신되면 못 가리”
|김성훈 경실련 소비자정의 대표, 전 농림부장관
세계사에 빛나는 프랑스 시민혁명과 중국의 태평천국 운동에 비견될 풀뿌리 민초들의 동학농민혁명은 지금으로부터 꼭 120년 전 1884년 1월 10일, 전라도 고부군수 조병갑의 가렴주구와 횡포에 견디다 못한 일단의 농민들이 고부 이평의 말목장터에서 죽창을 들고 일어난 데서 발단되었다. 농민들의 부역으로 보(洑)를 만든 다음, 과다한 수세(水稅)를 부과한 것이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관아를 접수하여 조병갑을 축출하고 빼앗겼던 세곡을 농민들에게 나눠주었으며 만석보를 혁파하였다. 요원의 들불처럼 10여만명으로 늘어난 동학 농민군들은 “부패척결과 내정개혁, 척양척왜(斥洋斥倭)”를 부르짖으며 삽시간에 전국 방방곡곡으로 번져갔다. 그만큼 조선조 왕조의 무능과 탐관오리들의 가렴주구 행위가 만연했었기 때문이다.
풀뿌리 민초들의 ‘동학 농민혁명’
이 틈새에 호시탐탐 한반도 침탈을 노리던 일제의 혼성 제9여단은 경복궁을 기습 점령하여 민씨 정권을 내쫓고 친일 개화파를 불러들여 김홍집을 내각수반으로 삼아 잠시 갑오개혁(일명 갑오경장)을 실시하고, 다른 한편 충청도 아산만에서 중국 선박을 공격하는 것을 시발로 청일전쟁(1894. 7.25~1895. 4.17)을 일으켰다. 이는 갑오 농민혁명을 핑계 삼아 일제와 그 주구들이 일으킨 난동일 뿐, 진정한 개혁·개방과는 동떨어진 제국주의 열강들의 침략 야욕이 빚어낸 사건들이다. 참고로 갑오경장을 불러들인 경복궁 기습은 일본군 여단장 오시마 요시마사(大島義昌)가 주도하였는데 그는 현 일본 총리(아베 신조)의 모계 증조할아버지이다.
“사람이 곧 하늘이다.(人乃天)”라는 동학사상은 학정에 시달려온 농민대중의 민주 민권 민생주의의 근본을 깨닫게 한 등불이 되었고 일본, 청나라, 러시아, 구미 등 외세들의 침탈을 막아 보려는 풀뿌리 민초들의 염원을 담아내고 있었다. 그 당시 불렸던 두 민요가 지금도 애처롭게 전해 온다. 그 첫 번째가 “갑오세(甲午歲) 가보세, 을미(乙未)적 을미적 거리다, 병신(丙申)이 되면 못가리.”이다. 갑오년에 부패를 척결하고 내정개혁과 외세 배격을 단행하지 못하고 다음해 을미년까지 허송세월하다 병신년이 되면 나라와 백성이 병신이 된다는 뜻을 함축하는 예언적인 노래이다. 아니나 다를까, 민씨 정권의 무능과 부패로 인해 갑오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난지 만 11년째인 1905년에는 마침내 우리나라 외교권이 박탈당한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되었고, 그 후 5년이 지나 1910년에는 완전히 합방되어 국권을 상실하였다. 대한제국과 국민은 나라와 주권이 없는 식민지의 병신이 된 것이다.
인간애 넘쳤던 녹두장군 전봉준
나는 지금도 논산-천안 민자고속도로를 통과할 때마다 이인에서 공주로 향한 우금치 쪽을 보지 않으려 애를 쓴다. 1894년 11월 그곳 우금치에서 2천여 관군과 600 일본군이 스나이더 소총과 기관총을 앞세워 1만여 동학농민군을 500여명만 남기고 무참하게 전멸시켰던 장면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한달 후 전북 순창 피노 마을에 피신해 있던 녹두장군(5척 단구의 눈빛이 형형하게 빛나는 전봉준의 작은 키 때문에 그렇게 불리웠다.)은 현상금에 눈이 어둔 그의 측근 김경천의 밀고로 일본군에 붙들린다. 서울까지 압송되어 이듬해 교수형에 처해졌다.
녹두장군 전봉준은 참으로 인간애와 인간미가 넘치는 지도자이었다. 서당 선생이었던 자신의 아버지 전창혁이 학정에 항의하다가 관가에 붙들려가 장살(丈殺)을 당했지만, 자기의 슬픔보다도 주변 사람들의 고통을 보고 못 참는 성격이었다. 백성들과 희노애락 생로병사를 함께 했던 많은 에피소드가 전해 내려온다. 그중 백미(白眉)는 동학의 고부 접주(接主)인 그가 서울로 잡혀가 갖은 고문을 받으며 윗선을 대라고 요구 받았지만 끝까지 자기 자신의 본심에서 우러난 봉기였음을 주장하여 자신을 접주로 임명한 동학교주 최시형 선생을 보호하였다.
그 당시 민중 사이에서 불리던 노래,
“새야 새야 파랑새야/녹두밭에 앉지 마라/녹두 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 간다!/새야 새야 파랑새야/댓잎 솔산 푸르다고 하절인줄 알았더니/백설이 펄펄 엄동설한 되었구나/새야 새야 파랑새야/꽃 향기 맡고서 우리님이 오시면/너랑 나랑 둘이서 마중 나가자!”
지방에 따라 지역에 따라 가사와 곡조가 약간씩 다르지만 120년이 흐른 지금도 이 노래가 민초들 가운데서 끊어지지 않고 불리고 있다. 그중 어렸을 적 우리 동네 어머니들이 부르던 곡조가 가장 구슬프고, 가사는 위에 소개한 바와 같다.
수세 폐지로 동학농민 ‘비원’ 풀어
필자는 어렸을 때 동네 어른들이 흥얼흥얼 부르던 이 노래를 정식으로 배우지 않았는데도 나도 모르는 새 요즘 종종 흥얼대는 자신을 발견하고 스스로 깜짝 놀란다. 며칠 전 캐나다 유기농 연수단원들의 신년모임에 나갔을 때 진도 홍주를 한 잔씩 나눠 마시다가 이 노래가 튀어 나와 서로 바꿔가며 부르면서 충청도 경상도 강원도의 곡조는 비교적 경쾌한데 비하여 전라도의 곡조가 너무 비감(悲感)하여 모두들 한때 숙연하였다. 아마도 그 동학혁명 토벌기간 마지막으로 전라도 나주와 장흥 지방 일대에서 일본군에 의해 시산혈해(屍山血海)로 죽어간 농민군들의 수가 너무 많고 광범위하여 그 원한과 넋이 깊숙이 베어든 때문인 것 같다.
필자는 IMF 치하 1998년 농림부 재임 시절, 7월11일 전북 정읍의 전봉준 동학농민혁명 유적 기념지에서 제29회 이동장관실을 개최하였다. 그리고 녹두장군 사당에 들어가 ‘못 다한 동학 농민들의 비원을 풀기’ 위하여 물과 토지 관련 3기관(농조, 농조련, 농진공)을 축소 통합하여 수세를 완전 폐지하겠노라고 굳게 맹세하였다.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새 천년이 시작되는 2000년 1월5일 세 기관을 축소통합한 농업기반공사를 발족하면서 김대중 대통령의 이름으로 만천하에 수세 폐지를 선언하였다. 그동안 농조개혁에 동조하여 적극 지원해오던 윤근환 전장관, 김영진, 이길재, 최선영 의원, 전농의 이수금, 김준규 선생, 농기협의 정장섭, 강춘성 회장, 그리고 농진공의 문동신 사장(현 군산시장) 등이 그 자리에 함께 참석하였다. 모두들 수세 폐지 선언을 환영하면서 지하의 녹두장군과 동학 농민들이 더덩실 춤을 추며 반겨했을 것이라고 기쁨을 나누었다. 이로써 1894년 조병갑의 과다 수세 징수 횡포와 1918년 일제 토지조사사업에 의해 공식화한 수세 징수가 이 땅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이다. 지구상에 수리조합이 있는 나라 중에 수세를 징수하지 않는 최초의 나라가 된 것이다.
120년 전과 다름없는 ‘3농 죽이기’
그러나 오늘날 우리나라 농업 농촌 농민을 둘러싸고 전개되고 있는 국내외의 ‘3농 죽이기’ 형세는 형식과 형태만 다를 뿐, 120년 전 녹두장군 시대나 별로 다름이 없는 것 같다. 규모가 더 커졌고 국내외 대기업 자본의 공세가 더 악랄해진 점이 다르다면 다르다.
인자함이 없는 천민자본주의 경제사회 현상, 섬세함이 없는 정부의 밀어붙이기식 FTA, TPP 등 강공 드라이브, 약자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고 사람을 놓친 무작정 효율 개발 경쟁 제일주의의 성장정책, 배고픔을 경험해 보지 못한 세대들에 의한 식량·농 업 정책의 빈 껍데기화, 환경생태계에 녹색 색맹이나 다름없는 토건세력과 상공업 수출 재벌들의 일방통행, 아, 무엇보다도 역사의식이 결여된 세계화라는 글로벌리즘이 지금 도처에서 농민들을 짓누르고 울리고 있다. 농업 농촌 농민 3농의 쇠락을 부채질하고 있다.
특히 전국 농지와 산지의 과반이 부재지주 비농민에게 넘어가 있고, 전국의 토지와 부동산 80% 이상을 4%의 상위층이 독식하고 있는 토지정책의 문란은 대한민국의 모든 경제생활과 생산 활동 전 부문에 걸쳐 높은 각종 요율과 물가상승을 부추기고 있다. 종내는 나라 경제와 사회안정에 파국을 불러 올지 모를 형세이다. 뿐만 아니다. 수지가 맞는 각종 국공유기업의 민영화, 사영화 조치가 남발되고, 전현직 대통령을 포함한 2000만건이 넘는 카드 정보 유출 등 각종 내정의 문란(紊亂)은 장차 이 나라의 기초이자 주권의 기틀마저 흔들고 있다. 무엇보다도 먼저 농정과 토지정책을 바로 잡는 일부터 새로 시작해야 할 것 같다. 우리 모두, ‘가보세 가보세, 을미적 을미적 거리다간, 병신이 되면 가지 못하리.’라는 갑오 동학농민들의 노래가 다시 들리는 환청 환각에 사로잡히지 말고, 우선 참다운 선진국형 지방자치제도와 지방재정 분권주의를 실현시켜야 3농을 살릴 수 있을 것 같다. 파랑새의 희망인 진정한 내정개혁과 탐욕투성이 기업자본주의 외세를 고쳐 나가야겠다.
이 글은 2014년 1월 27일 농어민신문에 실린 글 입니다.
|김성훈 경실련 소비자정의 대표, 전 농림부장관
세계사에 빛나는 프랑스 시민혁명과 중국의 태평천국 운동에 비견될 풀뿌리 민초들의 동학농민혁명은 지금으로부터 꼭 120년 전 1884년 1월 10일, 전라도 고부군수 조병갑의 가렴주구와 횡포에 견디다 못한 일단의 농민들이 고부 이평의 말목장터에서 죽창을 들고 일어난 데서 발단되었다. 농민들의 부역으로 보(洑)를 만든 다음, 과다한 수세(水稅)를 부과한 것이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관아를 접수하여 조병갑을 축출하고 빼앗겼던 세곡을 농민들에게 나눠주었으며 만석보를 혁파하였다. 요원의 들불처럼 10여만명으로 늘어난 동학 농민군들은 “부패척결과 내정개혁, 척양척왜(斥洋斥倭)”를 부르짖으며 삽시간에 전국 방방곡곡으로 번져갔다. 그만큼 조선조 왕조의 무능과 탐관오리들의 가렴주구 행위가 만연했었기 때문이다.
풀뿌리 민초들의 ‘동학 농민혁명’
이 틈새에 호시탐탐 한반도 침탈을 노리던 일제의 혼성 제9여단은 경복궁을 기습 점령하여 민씨 정권을 내쫓고 친일 개화파를 불러들여 김홍집을 내각수반으로 삼아 잠시 갑오개혁(일명 갑오경장)을 실시하고, 다른 한편 충청도 아산만에서 중국 선박을 공격하는 것을 시발로 청일전쟁(1894. 7.25~1895. 4.17)을 일으켰다. 이는 갑오 농민혁명을 핑계 삼아 일제와 그 주구들이 일으킨 난동일 뿐, 진정한 개혁·개방과는 동떨어진 제국주의 열강들의 침략 야욕이 빚어낸 사건들이다. 참고로 갑오경장을 불러들인 경복궁 기습은 일본군 여단장 오시마 요시마사(大島義昌)가 주도하였는데 그는 현 일본 총리(아베 신조)의 모계 증조할아버지이다.
“사람이 곧 하늘이다.(人乃天)”라는 동학사상은 학정에 시달려온 농민대중의 민주 민권 민생주의의 근본을 깨닫게 한 등불이 되었고 일본, 청나라, 러시아, 구미 등 외세들의 침탈을 막아 보려는 풀뿌리 민초들의 염원을 담아내고 있었다. 그 당시 불렸던 두 민요가 지금도 애처롭게 전해 온다. 그 첫 번째가 “갑오세(甲午歲) 가보세, 을미(乙未)적 을미적 거리다, 병신(丙申)이 되면 못가리.”이다. 갑오년에 부패를 척결하고 내정개혁과 외세 배격을 단행하지 못하고 다음해 을미년까지 허송세월하다 병신년이 되면 나라와 백성이 병신이 된다는 뜻을 함축하는 예언적인 노래이다. 아니나 다를까, 민씨 정권의 무능과 부패로 인해 갑오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난지 만 11년째인 1905년에는 마침내 우리나라 외교권이 박탈당한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되었고, 그 후 5년이 지나 1910년에는 완전히 합방되어 국권을 상실하였다. 대한제국과 국민은 나라와 주권이 없는 식민지의 병신이 된 것이다.
인간애 넘쳤던 녹두장군 전봉준
나는 지금도 논산-천안 민자고속도로를 통과할 때마다 이인에서 공주로 향한 우금치 쪽을 보지 않으려 애를 쓴다. 1894년 11월 그곳 우금치에서 2천여 관군과 600 일본군이 스나이더 소총과 기관총을 앞세워 1만여 동학농민군을 500여명만 남기고 무참하게 전멸시켰던 장면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한달 후 전북 순창 피노 마을에 피신해 있던 녹두장군(5척 단구의 눈빛이 형형하게 빛나는 전봉준의 작은 키 때문에 그렇게 불리웠다.)은 현상금에 눈이 어둔 그의 측근 김경천의 밀고로 일본군에 붙들린다. 서울까지 압송되어 이듬해 교수형에 처해졌다.
녹두장군 전봉준은 참으로 인간애와 인간미가 넘치는 지도자이었다. 서당 선생이었던 자신의 아버지 전창혁이 학정에 항의하다가 관가에 붙들려가 장살(丈殺)을 당했지만, 자기의 슬픔보다도 주변 사람들의 고통을 보고 못 참는 성격이었다. 백성들과 희노애락 생로병사를 함께 했던 많은 에피소드가 전해 내려온다. 그중 백미(白眉)는 동학의 고부 접주(接主)인 그가 서울로 잡혀가 갖은 고문을 받으며 윗선을 대라고 요구 받았지만 끝까지 자기 자신의 본심에서 우러난 봉기였음을 주장하여 자신을 접주로 임명한 동학교주 최시형 선생을 보호하였다.
그 당시 민중 사이에서 불리던 노래,
“새야 새야 파랑새야/녹두밭에 앉지 마라/녹두 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 간다!/새야 새야 파랑새야/댓잎 솔산 푸르다고 하절인줄 알았더니/백설이 펄펄 엄동설한 되었구나/새야 새야 파랑새야/꽃 향기 맡고서 우리님이 오시면/너랑 나랑 둘이서 마중 나가자!”
지방에 따라 지역에 따라 가사와 곡조가 약간씩 다르지만 120년이 흐른 지금도 이 노래가 민초들 가운데서 끊어지지 않고 불리고 있다. 그중 어렸을 적 우리 동네 어머니들이 부르던 곡조가 가장 구슬프고, 가사는 위에 소개한 바와 같다.
수세 폐지로 동학농민 ‘비원’ 풀어
필자는 어렸을 때 동네 어른들이 흥얼흥얼 부르던 이 노래를 정식으로 배우지 않았는데도 나도 모르는 새 요즘 종종 흥얼대는 자신을 발견하고 스스로 깜짝 놀란다. 며칠 전 캐나다 유기농 연수단원들의 신년모임에 나갔을 때 진도 홍주를 한 잔씩 나눠 마시다가 이 노래가 튀어 나와 서로 바꿔가며 부르면서 충청도 경상도 강원도의 곡조는 비교적 경쾌한데 비하여 전라도의 곡조가 너무 비감(悲感)하여 모두들 한때 숙연하였다. 아마도 그 동학혁명 토벌기간 마지막으로 전라도 나주와 장흥 지방 일대에서 일본군에 의해 시산혈해(屍山血海)로 죽어간 농민군들의 수가 너무 많고 광범위하여 그 원한과 넋이 깊숙이 베어든 때문인 것 같다.
필자는 IMF 치하 1998년 농림부 재임 시절, 7월11일 전북 정읍의 전봉준 동학농민혁명 유적 기념지에서 제29회 이동장관실을 개최하였다. 그리고 녹두장군 사당에 들어가 ‘못 다한 동학 농민들의 비원을 풀기’ 위하여 물과 토지 관련 3기관(농조, 농조련, 농진공)을 축소 통합하여 수세를 완전 폐지하겠노라고 굳게 맹세하였다.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새 천년이 시작되는 2000년 1월5일 세 기관을 축소통합한 농업기반공사를 발족하면서 김대중 대통령의 이름으로 만천하에 수세 폐지를 선언하였다. 그동안 농조개혁에 동조하여 적극 지원해오던 윤근환 전장관, 김영진, 이길재, 최선영 의원, 전농의 이수금, 김준규 선생, 농기협의 정장섭, 강춘성 회장, 그리고 농진공의 문동신 사장(현 군산시장) 등이 그 자리에 함께 참석하였다. 모두들 수세 폐지 선언을 환영하면서 지하의 녹두장군과 동학 농민들이 더덩실 춤을 추며 반겨했을 것이라고 기쁨을 나누었다. 이로써 1894년 조병갑의 과다 수세 징수 횡포와 1918년 일제 토지조사사업에 의해 공식화한 수세 징수가 이 땅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이다. 지구상에 수리조합이 있는 나라 중에 수세를 징수하지 않는 최초의 나라가 된 것이다.
120년 전과 다름없는 ‘3농 죽이기’
그러나 오늘날 우리나라 농업 농촌 농민을 둘러싸고 전개되고 있는 국내외의 ‘3농 죽이기’ 형세는 형식과 형태만 다를 뿐, 120년 전 녹두장군 시대나 별로 다름이 없는 것 같다. 규모가 더 커졌고 국내외 대기업 자본의 공세가 더 악랄해진 점이 다르다면 다르다.
인자함이 없는 천민자본주의 경제사회 현상, 섬세함이 없는 정부의 밀어붙이기식 FTA, TPP 등 강공 드라이브, 약자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고 사람을 놓친 무작정 효율 개발 경쟁 제일주의의 성장정책, 배고픔을 경험해 보지 못한 세대들에 의한 식량·농 업 정책의 빈 껍데기화, 환경생태계에 녹색 색맹이나 다름없는 토건세력과 상공업 수출 재벌들의 일방통행, 아, 무엇보다도 역사의식이 결여된 세계화라는 글로벌리즘이 지금 도처에서 농민들을 짓누르고 울리고 있다. 농업 농촌 농민 3농의 쇠락을 부채질하고 있다.
특히 전국 농지와 산지의 과반이 부재지주 비농민에게 넘어가 있고, 전국의 토지와 부동산 80% 이상을 4%의 상위층이 독식하고 있는 토지정책의 문란은 대한민국의 모든 경제생활과 생산 활동 전 부문에 걸쳐 높은 각종 요율과 물가상승을 부추기고 있다. 종내는 나라 경제와 사회안정에 파국을 불러 올지 모를 형세이다. 뿐만 아니다. 수지가 맞는 각종 국공유기업의 민영화, 사영화 조치가 남발되고, 전현직 대통령을 포함한 2000만건이 넘는 카드 정보 유출 등 각종 내정의 문란(紊亂)은 장차 이 나라의 기초이자 주권의 기틀마저 흔들고 있다. 무엇보다도 먼저 농정과 토지정책을 바로 잡는 일부터 새로 시작해야 할 것 같다. 우리 모두, ‘가보세 가보세, 을미적 을미적 거리다간, 병신이 되면 가지 못하리.’라는 갑오 동학농민들의 노래가 다시 들리는 환청 환각에 사로잡히지 말고, 우선 참다운 선진국형 지방자치제도와 지방재정 분권주의를 실현시켜야 3농을 살릴 수 있을 것 같다. 파랑새의 희망인 진정한 내정개혁과 탐욕투성이 기업자본주의 외세를 고쳐 나가야겠다.
이 글은 2014년 1월 27일 농어민신문에 실린 글 입니다.
- 첨부파일1 김성훈.jpg (용량 : 8.9K / 다운로드수 : 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