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12척의 배가 남아 있다 | 윤병선 건국대 교수
- 작성일2020/03/05 16:53
- 조회 604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 있다
| 윤병선 건국대 교수
고립무원(孤立無援)이라는 말이 있다. 그야말로 홀로 돼 어디 기댈 곳이 없는 안타까운 상황을 빗대서 하는 말이다.
지금 한국 농업의 현실은 이 말로도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든 상태에 놓여있다. 끝 모를 농산물 가격의 폭락, 쌀 관세화라는 커다란 태풍, 연타석 FTA가 이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농업의 희망을 어디에서 찾아야 할지 막막한 상황이다. 급기야 우루과이라운드(UR) 이후에 한국 농업이 살 수 있는 길이라던 친환경농업마저도 언필칭 공영방송 KBS의 ‘친환경 유기농의 진실’이라는 선정적 프로그램을 앞세운 공세를 받고 있다.
효율·실적 중시하는 농정 탓 위기
이런 상황에서 과연 한국 농업의 활로는 전혀 없는 것인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종자에서부터 식탁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과정을 거대 자본이 지배하는 현대의 농식품체계에서 농민이 주체로 나설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인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차근히 생각해 보자. 현재의 농업문제, 먹거리문제는 본질적으로 농업과 먹거리에 관한 주도권을 거대자본이 독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이다. 농민의 생활이 여유롭지 못한 것도 이 때문이다. 농사에 필요한 종자와 비료, 농약, 농기계 등 농자재를 거대자본에 의존하고 있다. 현대의 농업은 사람이 짓는 것이 아니라 석유가 짓는다는 말이 나온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다수확품종이라는 말을 믿고 농사를 지었지만, 늘어나는 것은 부채였고, 병원비였다. 더욱이 이러한 농업은 살림의 농업이 아니라, 죽임의 농업이었다. 땅을 망가뜨리고, 물을 오염시키고, 식탁에 오르는 먹거리의 안전마저 훼손했다. 이러한 악순환을 끊고 그 굴레에서 벗어나려는 고민에서 출발한 것이 친환경농업, 유기농업이었다.
농약 없이는 해충이 창궐하는 것을 막을 수 없는 상황에서는 농약 없는 농사가 능사가 될 수는 없다. 지력이 딸리는 상황에서 화학비료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정부가 추진했던 정책이 친환경농업을 육성하기 위한 친환경 농자재 지원사업이었다. 소비자들이 안심하고 친환경농산물을 구입토록 함으로써 친환경농산물의 수요를 확대하겠다는 취지로 인증제도도 도입됐다. 이로 인해서 유기농업을 포함한 친환경농업은 그 가치를 제대로 평가받기도 전에, 그 가치에 대한 공감과 확산이 있기도 전에 농가소득창출의 수단으로만 부각돼 버렸고, 안전한 농산물만으로 인식되게 됐다. 과정이 생략된 채 결과치만 중시되는 효율중시·실적중시의 농정, 녹색혁명형 농업에 걸맞을법한 농정이 친환경농업육성정책의 기본적 내용으로 채워져 버렸다.
고립무원 한국농업 활로 찾아야
친환경농업은 기본적으로 순환을 고민한 영농이다. 이는 끊임없이 자원이 외부로부터 유입되는 것을 전제로 하는 녹색혁명형 농업에 의해서 망가져버린 농업의 지속가능성을 회복하려는 고민과 연결돼 있다. 이런 점에서 친환경농업에 필요한 자재는 당연히 농민의 손으로부터 나올 수 있도록 고민했어야 했고, 그 농민이 살고 있는 지역사회로부터 더 많이 나올 수 있도록 해야 했다. 그러나 정부의 친환경농업정책이 자재지원중심으로 이뤄지다보니 예전에는 농민들 스스로가 생산하던 농자재조차 외부에 의존하는 시스템이 돼버렸고, 친환경농업의 주도권이 친환경농자재 생산업체에게로 넘어가버렸다. 그 결과는 인증기관, 생산업체, 농민사이의 고리가 만들어지는 구조로 귀결됐다.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과거의 녹색혁명형 농업에 기반을 둔 농식품체계와 본질적으로는 다를 바가 없는 농식품체계가 친환경이라는 이름으로 대체됐다고 할 수 있다.
농민 스스로 주체 되는 농법으로
농민 스스로의 힘에 의해서 땅을 살리고, 자연과 함께 하고, 그래서 믿을 수 있는 먹거리를 생산하는 것은 불가능할까? 농민들 스스로가 땅을 살려내는 투입재를 만들어서 외부자재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고, 외부로 유출되는 돈을 줄이고, 소비자의 신뢰를 얻는 농법은 과연 없는 것일까? 자본에게는 이득이 되지는 않지만, 농민과 소비자에게 이득을 줄 수 있는 농법은 과연 없는 것일까?
다행히 우리 사회에는 이런 고민을 일찍부터 실천하면서 우리의 농업을 바꾸기 위해서 노력하는 많은 농민들과 농민과학자들이 아직도 남아 있다. 정농회의 창립회원이면서 생명역동농업(Bio-Dynamic Agriculture) 실천연구회를 맡고 있는 김준권 회장은 이 농법을 실천하는데 필요한 농사력을 우리나라의 자연환경에 맞도록 정리해 6년째 발행해 오면서, 이에 필요한 유기농자재를 회원들과 함께 만들어 현장에서 실천하고 있다. 자닮(자연을 닮은 사람들)의 조영상 대표는 친환경농업기술의 고비용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우리 농업은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라며, 전국의 많은 농민들에게 비용을 적게 들이는 초저비용 친환경농업의 실천법을 보여주고 있다. 이외에도 정상묵 회장은 BM활성수를 이용해 가축분뇨의 활용과 토양개량이 가능하다는 것을 양평지역의 친환경농업을 통해 가시적 성과를 보여주고 있다. 최근에는 농촌진흥청도 이러한 대안농법들에 대해서 높은 관심을 갖고 참여하고 있는 것도 큰 힘이 될 것이다.
우리에게는 아직도 12척의 배가 남아있다. 남은 일은 우리 모두의 몫이다.
이 글은 한국농어민신문 2014년 8월15일에 실린 글입니다.
| 윤병선 건국대 교수
고립무원(孤立無援)이라는 말이 있다. 그야말로 홀로 돼 어디 기댈 곳이 없는 안타까운 상황을 빗대서 하는 말이다.
지금 한국 농업의 현실은 이 말로도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든 상태에 놓여있다. 끝 모를 농산물 가격의 폭락, 쌀 관세화라는 커다란 태풍, 연타석 FTA가 이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농업의 희망을 어디에서 찾아야 할지 막막한 상황이다. 급기야 우루과이라운드(UR) 이후에 한국 농업이 살 수 있는 길이라던 친환경농업마저도 언필칭 공영방송 KBS의 ‘친환경 유기농의 진실’이라는 선정적 프로그램을 앞세운 공세를 받고 있다.
효율·실적 중시하는 농정 탓 위기
이런 상황에서 과연 한국 농업의 활로는 전혀 없는 것인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종자에서부터 식탁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과정을 거대 자본이 지배하는 현대의 농식품체계에서 농민이 주체로 나설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인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차근히 생각해 보자. 현재의 농업문제, 먹거리문제는 본질적으로 농업과 먹거리에 관한 주도권을 거대자본이 독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이다. 농민의 생활이 여유롭지 못한 것도 이 때문이다. 농사에 필요한 종자와 비료, 농약, 농기계 등 농자재를 거대자본에 의존하고 있다. 현대의 농업은 사람이 짓는 것이 아니라 석유가 짓는다는 말이 나온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다수확품종이라는 말을 믿고 농사를 지었지만, 늘어나는 것은 부채였고, 병원비였다. 더욱이 이러한 농업은 살림의 농업이 아니라, 죽임의 농업이었다. 땅을 망가뜨리고, 물을 오염시키고, 식탁에 오르는 먹거리의 안전마저 훼손했다. 이러한 악순환을 끊고 그 굴레에서 벗어나려는 고민에서 출발한 것이 친환경농업, 유기농업이었다.
농약 없이는 해충이 창궐하는 것을 막을 수 없는 상황에서는 농약 없는 농사가 능사가 될 수는 없다. 지력이 딸리는 상황에서 화학비료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정부가 추진했던 정책이 친환경농업을 육성하기 위한 친환경 농자재 지원사업이었다. 소비자들이 안심하고 친환경농산물을 구입토록 함으로써 친환경농산물의 수요를 확대하겠다는 취지로 인증제도도 도입됐다. 이로 인해서 유기농업을 포함한 친환경농업은 그 가치를 제대로 평가받기도 전에, 그 가치에 대한 공감과 확산이 있기도 전에 농가소득창출의 수단으로만 부각돼 버렸고, 안전한 농산물만으로 인식되게 됐다. 과정이 생략된 채 결과치만 중시되는 효율중시·실적중시의 농정, 녹색혁명형 농업에 걸맞을법한 농정이 친환경농업육성정책의 기본적 내용으로 채워져 버렸다.
고립무원 한국농업 활로 찾아야
친환경농업은 기본적으로 순환을 고민한 영농이다. 이는 끊임없이 자원이 외부로부터 유입되는 것을 전제로 하는 녹색혁명형 농업에 의해서 망가져버린 농업의 지속가능성을 회복하려는 고민과 연결돼 있다. 이런 점에서 친환경농업에 필요한 자재는 당연히 농민의 손으로부터 나올 수 있도록 고민했어야 했고, 그 농민이 살고 있는 지역사회로부터 더 많이 나올 수 있도록 해야 했다. 그러나 정부의 친환경농업정책이 자재지원중심으로 이뤄지다보니 예전에는 농민들 스스로가 생산하던 농자재조차 외부에 의존하는 시스템이 돼버렸고, 친환경농업의 주도권이 친환경농자재 생산업체에게로 넘어가버렸다. 그 결과는 인증기관, 생산업체, 농민사이의 고리가 만들어지는 구조로 귀결됐다.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과거의 녹색혁명형 농업에 기반을 둔 농식품체계와 본질적으로는 다를 바가 없는 농식품체계가 친환경이라는 이름으로 대체됐다고 할 수 있다.
농민 스스로 주체 되는 농법으로
농민 스스로의 힘에 의해서 땅을 살리고, 자연과 함께 하고, 그래서 믿을 수 있는 먹거리를 생산하는 것은 불가능할까? 농민들 스스로가 땅을 살려내는 투입재를 만들어서 외부자재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고, 외부로 유출되는 돈을 줄이고, 소비자의 신뢰를 얻는 농법은 과연 없는 것일까? 자본에게는 이득이 되지는 않지만, 농민과 소비자에게 이득을 줄 수 있는 농법은 과연 없는 것일까?
다행히 우리 사회에는 이런 고민을 일찍부터 실천하면서 우리의 농업을 바꾸기 위해서 노력하는 많은 농민들과 농민과학자들이 아직도 남아 있다. 정농회의 창립회원이면서 생명역동농업(Bio-Dynamic Agriculture) 실천연구회를 맡고 있는 김준권 회장은 이 농법을 실천하는데 필요한 농사력을 우리나라의 자연환경에 맞도록 정리해 6년째 발행해 오면서, 이에 필요한 유기농자재를 회원들과 함께 만들어 현장에서 실천하고 있다. 자닮(자연을 닮은 사람들)의 조영상 대표는 친환경농업기술의 고비용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우리 농업은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라며, 전국의 많은 농민들에게 비용을 적게 들이는 초저비용 친환경농업의 실천법을 보여주고 있다. 이외에도 정상묵 회장은 BM활성수를 이용해 가축분뇨의 활용과 토양개량이 가능하다는 것을 양평지역의 친환경농업을 통해 가시적 성과를 보여주고 있다. 최근에는 농촌진흥청도 이러한 대안농법들에 대해서 높은 관심을 갖고 참여하고 있는 것도 큰 힘이 될 것이다.
우리에게는 아직도 12척의 배가 남아있다. 남은 일은 우리 모두의 몫이다.
이 글은 한국농어민신문 2014년 8월15일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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