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총행복과 먹을거리 기본법 제정 | 박진도 지역재단 상임고문, 충남대 명예교수
- 작성일2021/12/05 11:58
- 조회 562
사람은 누구나 언제 어디서나 자신의 생존에 필수적인 건강하고 안전한 먹을거리를 안정적으로 섭취할 권리가 있다. 유엔은 1948년 세계인권선언(제25조)과 1966년 ‘경제적 사회적 및 문화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제11조)’을 통해 ‘적절한 먹을거리(adequate food)’를 인간의 기본권리(인권)로 선언하였고, 우리나라는 국제규약에 1990년 가입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과연 얼마나 먹을거리 기본권을 보장받고 있는가.
전남 해남군에서 지난 10월 26일 시작한 국민총행복과 농산어촌 개벽대행진은 지금까지 8개도 18개 시·군 가운데 6개도 13개 시·군을 순회하며 민회(民會)를 개최했다. 민회에서는 우리가 제안한 3강 5략에 대한 관심이 뜨거웠다. 5략 가운데 농민기여직불확대(10월 칼럼), 농촌주민수당지급(11월 칼럼)에 이어 이번 칼럼에서는 두 번째 강령인 ‘먹을거리 위기에 대응한 농촌으로 개벽’하기 위한 세 번째 방략 ‘먹을거리 기본법’ 제정을 다룬다.
밥 그리고 농민이 천대받는 세상
나는 아버지의 남다른 교육열로 일찍 유학을 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아버지의 고향인 부산으로 전학을 갔고, 중학교 때 대학가는 큰 누이를 따라 서울로 올라왔다. 누이와 둘이서 장맛비에 물이 넘치는 문간방에서 자취를 했다. 사과상자(나무 궤짝) 두 개를 겹쳐 찬장 대신 사용했고, 곤로 하나로 취사를 해결했다. 아무래도 먹는 게 변변치 않아 얼굴색이 좋지 않았다.
가끔 서울 온 아버지는 아들이 걱정돼 큰맘 먹고 1년에 한 차례씩 한약방에서 보약을 지어주셨다. 그렇다. ‘라떼’는 보약이 최고의 건강식이었고, 한약방의 주요 수입원이었다. 그런데 얼마 전 한의원 하는 친구를 만났더니 요즈음은 보약을 찾는 사람이 별로 없다고 한다. 무엇으로 돈을 버느냐고 하니 다이어트약이 주된 수입원이란다.
보약에서 다이어트약으로 한약의 극적인 전환, 영양부족에서 비만을 걱정하는 시대가 됐다. 주위에 먹을거리가 지천이다. 음식물의 1/7은 먹지 않고 쓰레기로 버려지고, 그로 인한 경제적 손실이 연간 20조원에 달한다고 한다. 옛 어른들은 ‘밥은 하늘’이고, ‘음식을 버리면 천벌을 받는다’고 했으나, 지금은 ‘밥이 다이어트의 적’으로 천대받는 세상이다. 이러니 밥을 생산하는 농민이 사회적으로 좋은 대우를 받을 수 없다. 농자천하지대본이 아니라 ‘농자천하지대봉’이라는 비아냥조차 들린다.
그런데 알고 보면 우리가 생산한 것을 먹고 버리는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의 식량자급률은 45.8%(2019년)에 지나지 않는데, 이도 사실상 착시를 불러오는 수치다. 사료용 곡물을 제외하고 사람이 직접 먹는 주식용 곡물만을 대상으로 산정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주식용 곡물보다 훨씬 많은 사료용 곡물을 수입한다. 사료를 먹여 키운 소, 돼지, 닭, 생선 등을 먹어서 필요한 에너지를 보충하기 때문에, 사료용 곡물을 포함한 곡물자급률이 더 정확한 지표다.
우리나라의 곡물자급률은 21%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섭취하는 칼로리를 기준으로 해도 자급률은 35%에 지나지 않는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이러한 자급률이 매년 낮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곡물자급률은 1975년 73%에서 1995년 29.1%로 급격히 하락한 후 2015년 23.9%, 2019년 21%로 하락했다.
매년 하락하는 곡물자급률
우리나라는 매년 1,700만톤 이상의 곡물을 수입하는 세계 5대 곡물수입국이다. 곡물별 자급률(2019년)을 보면, 쌀은 92.1%지만, 밀 0.5%, 옥수수 0.7%, 콩 6.6% 등으로 쌀을 제외한 전체 곡물자급률은 3.4%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나라는 유럽 등에서 수입이 금지된 유전자조작식품(GMO)을 세계에서 가장 많이 수입하는 나라이다. 2019년에 국내에 수입 승인된 식용 및 농업용 GMO는 총 1,164만톤(24.8억달러)인데, 농업용이 948.8만톤(82%), 식용이 215.5만톤(18%)으로, 2008년 대비 각각 35.2%, 38.8% 증가했다. 콩은 전체 수입량의 80%, 옥수수는 전체 수입량의 75%가 GMO 농산물이다.
먹는 게 넘치고 의약이 발달하여 우리나라 사람의 기대수명은 83.3세(2019년 기준)로 세계적으로도 긴 편인데, 건강수명은 65세에 불과하다. 18년을 건강하지 않은 상태로 삶을 이어간다는 말이다. 우리 국민 1명이 받은 외래 진료 횟수는 연간 17.2회로, OECD 국가 중 가장 많았다. OECD 국가 평균(6.8회)의 2.5배 수준이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 주된 이유의 하나는 우리의 건강을 농약과 방부제에 찌든 정체불명의 수입농산물에 맡기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먹은 음식이 내 몸을 만든다(식약동원食藥同源).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생산된 농산물이라 해서 반드시 안전하고 건강한 농산물이라 할 수 없다. 우리나라는 주요 선진국에 비해 단위면적당 농약과 비료를 과도하게 사용하고 있다. 화학비료 사용량은 ha당 2012년 267kg에서 2018년에 268kg, 농약은 2012년 9.9kg에서 2016년 11.8kg으로 증가했다. 그 결과 토양 내 질소(N)와 인(P)의 집적률이 OECD 국가 평균의 3.4배와 8.6배에 달해 가장 높다.
축산의 경우도 공장식으로 밀식 사육하기 때문에 가축집적도가 OECD 평균의 3배가 넘는다. 여기에 우리 농토에 맞지 않는 고가의 농기계가 과다 투입되고 있다. 고투입 농업은 소비자 건강과 환경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다. 농자재를 과다 투입함으로 인해 최근 농업생산성은 노동생산성, 토지생산성, 자본생산성 모두 감소하고 있다.
먹을거리 취약계층의 건강이 위험하다
먹을거리가 넘친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충분한 영양을 제대로 섭취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보건복지부 ‘국민건강영양조사’에 의하면, 에너지권장 섭취량의 75% 미만을 섭취하는 영양섭취 부족자가 적지 않다. 연령별로 보면 65세 이상 연령층에서 14.4%, 50~64세에서 8.8%, 30~49세에서 14.4%, 19~29세에서 16.2%, 19세 미만에서 35.1%가 영양섭취 부족자이다.
특히 청소년이 심각한데, 이는 주 5일 이상 아침식사를 거르는 비율이 매우 높고(2019년 35.7%), 주 3회 이상 패스트푸드를 섭취하는 비율이 높은 것(주 3회 이상 패스트푸드 섭취 비율 25.5%)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소득수준이 낮은 계층에서 영양상태가 더 좋지 않다. 2019년 하위계층의 영양섭취 부족자 비율은 18.9%로 2011년 12.6%보다 크게 늘어났다. 그리고 잘못된 식습관으로 비만율이 높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비만율은 2016년 27.9%에서 2018년 31.8%로 높아지고 있는데, 소득수준이 낮을수록 비만율이 높다.
소득수준이 가장 낮은 1분위 구간에서 고도 비만율은 5.12%, 초고도 비만율은 0.70%로 나타나는 반면에 소득수준이 높은 19분위의 구간에서 고도 비만율은 3.93%, 초고도 비만율은 20분위 구간에서 0.15%로 나타나고 있다.
먹을거리 불평등으로 인한 먹을거리 취약계층의 건강권이 심각하게 침해받고 있다. 미국에서 공부할 때 슈퍼마켓에서 만난 비만 여성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녀는 자신의 몸무게를 이길 수 없어 휠체어에 의존해 식품을 구입하고 있었는데, 손에는 빈곤층에 지급되는 푸드 스탬프를 들고 있었다.
푸드 스탬프는 저소득층 등 취약계층에 대해 식료품 구입비를 지원하기 위한 바우처이다. 미국 전체 가구의 약 16%인 4,200만명이 푸드 스탬프를 받는다. 정크푸드와 잘못된 식습관이 가난한 그녀의 건강을 망치고 있었다. 미국이 우리의 미래가 되지 않기 바란다.
먹을거리 위기,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우리 국민은 심각한 먹을거리 위기에 처해 있다. 먹을거리의 대부분을 정체불명의 수입농산물에 의존하고 있고, 국내에서 생산되는 농산물도 반드시 건강하다고 할 수 없다. 좋지 않은 음식과 잘못된 식습관이 국민 건강을 해치고 있다. 특히 소득이 낮은 취약계층은 영양부족과 비만으로 고통받고 있다. 국민의 먹을거리 기본권을 보장하는 것은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의 가장 중요한 의무이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첫째, 먹을거리의 국내 공급력을 높여 식량안보를 확보하고 식량주권을 회복해야 한다. 세계무역기구(WTO) 체제하에 확대되는 농산물무역은 식량안보를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다. 국제농산물시장은 매우 취약한 구조를 지닌다. 농산물은 공산품과 달리 세계시장에서 거래되는 교역량의 비중이 매우 적은 전형적인 ‘엷은 시장(thin market)’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주식으로 하는 쌀의 경우 국제시장에서 거래되는 양은 전체 쌀 생산량의 5% 내외에 지나지 않는다. 세계 곡물시장은 기본적으로 공급자의 과점(寡占)시장이다. 곡물수출국은 소수인 반면에 수입국은 다수이기 때문이다. 주요 농산물에 대한 3대 수출국의 비중을 보면, 밀 60%, 사료곡물 70%, 쌀 65%, 콩 90% 이상을 차지한다.
우리는 식용 밀의 48%를 미국, 44%를 호주, 8%를 캐나다에서 100% 수입하고 있다(2018년). 이러한 곡물시장은 ADM, 벙기(Bunge), 카길(Cargil), 루이 드레퓌스(Louis Dreyfus) 등 소위 메이저 ‘ABCD’가 지배하고 있다.
곡물메이저가 지배하는 ‘엷은 시장’에서는 생산량이 조금만 줄어도 곡물가격이 폭등할 수밖에 없다. 세계가 주기적으로 식량위기를 겪는 이유다. 더욱이 기후위기로 인해 전문가들은 심각한 식량위기가 닥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우리나라 5,000만 국민의 건강을 곡물메이저에게 맡길 수 없다.
식량자급률을 높여야 한다. 정부도 그 필요성을 잘 알고 있지만 실천하지 않는다. 농식품부는 2013년 발표한 ‘농업·농촌 및 식품산업 발전계획’에서 2022년 식량자급률 목표를 60%, 곡물자급률 목표를 32%로 정했고, 2018년에는 그 목표치를 각각 55.4%, 27.3%로 낮췄으나 실제로는 이에 훨씬 미치지 못한다. 식량자급률 제고를 위한 비상한 노력이 필요하다.
먹을거리 기본권 보장받아야
둘째, 국민 누구나 먹을거리 기본권을 보장받아야 한다. ‘먹을거리 보장(food security)’이란 ‘모든 사람이 언제나 활동적이고 건강한 삶을 위해 충분하고 안전하며 영양 있는 먹을거리를 필요와 기호에 따라 물리적, 사회적, 경제적으로 접근 가능한 상태’를 말한다. 이를 위해서는 소득수준이 낮아 영양을 제대로 섭취하지 못하는 절대적 먹을거리 취약계층뿐 아니라, 인구구조(고령화) 및 가구구성의 변화(1인 가구의 증가)나 식생활 소비패턴의 변화(외식 및 패스트푸드), 잘못된 식습관(아침 결식) 등으로 인한 사회적 먹을거리 취약계층 모두를 대상으로 하는 먹을거리정책의 공공성을 강화해야 한다.
구체적으로는 국가와 지방자치단체가 학교급식 및 공공급식 등 먹을거리에 대한 공공조달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또한 취약계층을 대상으로 한 먹을거리 바우처 제도를 전면 확대 도입하고, 아동·학생·노인·장애인·청년·임산부 등 계층별 특성에 맞는 먹을거리 공급체계를 갖춰야 한다. 아울러 지역 내 먹을거리 기반 사회적 경제조직을 육성하여 먹을거리 기반 공동체를 활성화해야 한다.
셋째, 건강하고 안전한 먹을거리 시스템이 구축되기 위해서는 식생활 교육과 식문화 가치 확산이 중요하다. 먹을거리 기본권을 보장하는 것은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의 의무이지만 그것은 ‘먹을거리 시민(food citizen)’의 실천을 통해 실현된다.
먹을거리 시민이란 먹을거리에 대한 바른 의식을 갖고 무엇을 먹고 어떻게 생활하고 실천해야 할지를 아는 사람을 말한다. 먹을거리 시민을 위해서는 농업과 환경을 배려하는 식생태(食生態) 교육을 유치원과 초·중·고등학교의 교과과정에 의무화하고, 평생학습 차원에서 생애 전주기 별로 올바른 식생활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
넷째, 기후위기에 대응한 지속가능한 먹을거리 생산체계를 갖추기 위해서는 관행농업을 친환경 생태농업으로 전환해야 하고, 지역먹을거리 순환체계를 확립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농민의 공익기여직불을 대폭 확대해야 하고, 먹을거리의 생산-소비-폐기의 전 과정에서 지역순환성을 높여야 한다.
시장원리에만 맡길 수 없는 농산물의 특성을 고려하여 지역먹을거리 체계를 통해 생산자와 소비자의 관계유통을 확대하고, 친환경농업에 필요한 투입재를 지역에서 조달하고, 남은 음식이나 음식물 폐기물을 지역에서 자원화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국가 먹을거리 종합전략 수립해야
마지막으로 먹을거리 기본권을 보장하기 위한 국가 먹을거리 종합전략을 수립하고 이것을 법제화하고 구체적으로 실천하기 위해 먹을거리 기본법을 제정해야 한다. 법을 만드는 것도 그것을 실천하는 것도 정책 당국의 의지에 달려 있다. 대통령직속 농어업·농어촌특별위원회는 2020년 12월 ‘국가먹거리종합전략’(안)을 마련했으나, 농식품부는 지난 9월 ‘국가식량계획’이란 같은 듯 다른 이름으로 내용을 왜곡하고 축소했다.
‘국가식량계획’은 먹을거리에 관한 비전과 구체적 전략을 결여한 페이퍼워크에 지나지 않는다. 식량안보 강화를 내세우지만, 식량자급률(곡물자급률)에 관한 목표조차 제시하지 않았고, 농업인의 날 대통령이 언급한 밀과 콩에 대해서만 자급률을 2025년까지 각각 5%와 33%로 높인다는 목표를 제시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마저도 실현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농식품부는 ‘농업·농촌 및 식품산업 발전계획’에서 제시한 전체 식량자급률 및 품목별 자급률의 목표치를 한 번도 달성한 적이 없지만, 반성도 없고 책임도 지지 않는다. ‘전국먹거리연대’는 농식품부의 “‘국가식량계획’은 농특위에서 논의하여 마련한 ‘국가먹거리종합전략’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는 반쪽짜리 계획에 불과하다”고 비판하고 “국민 먹거리기본권 보장을 위한 먹거리기본법을 제정하라”고 촉구했다.
기후위기는 농업위기와 먹을거리위기를 전면화하고 있다. 식량주권을 지키고 국민의 먹을거리 기본권을 보장하는 것은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책임지는 국가의 기본적 의무다.
출처 : 한국농정신문 '소빈 박진도의 가보세' 12월 5일자 보도
http://www.ikpnews.net/news/articleView.html?idxno=46012
전남 해남군에서 지난 10월 26일 시작한 국민총행복과 농산어촌 개벽대행진은 지금까지 8개도 18개 시·군 가운데 6개도 13개 시·군을 순회하며 민회(民會)를 개최했다. 민회에서는 우리가 제안한 3강 5략에 대한 관심이 뜨거웠다. 5략 가운데 농민기여직불확대(10월 칼럼), 농촌주민수당지급(11월 칼럼)에 이어 이번 칼럼에서는 두 번째 강령인 ‘먹을거리 위기에 대응한 농촌으로 개벽’하기 위한 세 번째 방략 ‘먹을거리 기본법’ 제정을 다룬다.
밥 그리고 농민이 천대받는 세상
나는 아버지의 남다른 교육열로 일찍 유학을 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아버지의 고향인 부산으로 전학을 갔고, 중학교 때 대학가는 큰 누이를 따라 서울로 올라왔다. 누이와 둘이서 장맛비에 물이 넘치는 문간방에서 자취를 했다. 사과상자(나무 궤짝) 두 개를 겹쳐 찬장 대신 사용했고, 곤로 하나로 취사를 해결했다. 아무래도 먹는 게 변변치 않아 얼굴색이 좋지 않았다.
가끔 서울 온 아버지는 아들이 걱정돼 큰맘 먹고 1년에 한 차례씩 한약방에서 보약을 지어주셨다. 그렇다. ‘라떼’는 보약이 최고의 건강식이었고, 한약방의 주요 수입원이었다. 그런데 얼마 전 한의원 하는 친구를 만났더니 요즈음은 보약을 찾는 사람이 별로 없다고 한다. 무엇으로 돈을 버느냐고 하니 다이어트약이 주된 수입원이란다.
보약에서 다이어트약으로 한약의 극적인 전환, 영양부족에서 비만을 걱정하는 시대가 됐다. 주위에 먹을거리가 지천이다. 음식물의 1/7은 먹지 않고 쓰레기로 버려지고, 그로 인한 경제적 손실이 연간 20조원에 달한다고 한다. 옛 어른들은 ‘밥은 하늘’이고, ‘음식을 버리면 천벌을 받는다’고 했으나, 지금은 ‘밥이 다이어트의 적’으로 천대받는 세상이다. 이러니 밥을 생산하는 농민이 사회적으로 좋은 대우를 받을 수 없다. 농자천하지대본이 아니라 ‘농자천하지대봉’이라는 비아냥조차 들린다.
그런데 알고 보면 우리가 생산한 것을 먹고 버리는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의 식량자급률은 45.8%(2019년)에 지나지 않는데, 이도 사실상 착시를 불러오는 수치다. 사료용 곡물을 제외하고 사람이 직접 먹는 주식용 곡물만을 대상으로 산정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주식용 곡물보다 훨씬 많은 사료용 곡물을 수입한다. 사료를 먹여 키운 소, 돼지, 닭, 생선 등을 먹어서 필요한 에너지를 보충하기 때문에, 사료용 곡물을 포함한 곡물자급률이 더 정확한 지표다.
우리나라의 곡물자급률은 21%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섭취하는 칼로리를 기준으로 해도 자급률은 35%에 지나지 않는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이러한 자급률이 매년 낮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곡물자급률은 1975년 73%에서 1995년 29.1%로 급격히 하락한 후 2015년 23.9%, 2019년 21%로 하락했다.
매년 하락하는 곡물자급률
우리나라는 매년 1,700만톤 이상의 곡물을 수입하는 세계 5대 곡물수입국이다. 곡물별 자급률(2019년)을 보면, 쌀은 92.1%지만, 밀 0.5%, 옥수수 0.7%, 콩 6.6% 등으로 쌀을 제외한 전체 곡물자급률은 3.4%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나라는 유럽 등에서 수입이 금지된 유전자조작식품(GMO)을 세계에서 가장 많이 수입하는 나라이다. 2019년에 국내에 수입 승인된 식용 및 농업용 GMO는 총 1,164만톤(24.8억달러)인데, 농업용이 948.8만톤(82%), 식용이 215.5만톤(18%)으로, 2008년 대비 각각 35.2%, 38.8% 증가했다. 콩은 전체 수입량의 80%, 옥수수는 전체 수입량의 75%가 GMO 농산물이다.
먹는 게 넘치고 의약이 발달하여 우리나라 사람의 기대수명은 83.3세(2019년 기준)로 세계적으로도 긴 편인데, 건강수명은 65세에 불과하다. 18년을 건강하지 않은 상태로 삶을 이어간다는 말이다. 우리 국민 1명이 받은 외래 진료 횟수는 연간 17.2회로, OECD 국가 중 가장 많았다. OECD 국가 평균(6.8회)의 2.5배 수준이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 주된 이유의 하나는 우리의 건강을 농약과 방부제에 찌든 정체불명의 수입농산물에 맡기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먹은 음식이 내 몸을 만든다(식약동원食藥同源).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생산된 농산물이라 해서 반드시 안전하고 건강한 농산물이라 할 수 없다. 우리나라는 주요 선진국에 비해 단위면적당 농약과 비료를 과도하게 사용하고 있다. 화학비료 사용량은 ha당 2012년 267kg에서 2018년에 268kg, 농약은 2012년 9.9kg에서 2016년 11.8kg으로 증가했다. 그 결과 토양 내 질소(N)와 인(P)의 집적률이 OECD 국가 평균의 3.4배와 8.6배에 달해 가장 높다.
축산의 경우도 공장식으로 밀식 사육하기 때문에 가축집적도가 OECD 평균의 3배가 넘는다. 여기에 우리 농토에 맞지 않는 고가의 농기계가 과다 투입되고 있다. 고투입 농업은 소비자 건강과 환경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다. 농자재를 과다 투입함으로 인해 최근 농업생산성은 노동생산성, 토지생산성, 자본생산성 모두 감소하고 있다.
먹을거리 취약계층의 건강이 위험하다
먹을거리가 넘친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충분한 영양을 제대로 섭취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보건복지부 ‘국민건강영양조사’에 의하면, 에너지권장 섭취량의 75% 미만을 섭취하는 영양섭취 부족자가 적지 않다. 연령별로 보면 65세 이상 연령층에서 14.4%, 50~64세에서 8.8%, 30~49세에서 14.4%, 19~29세에서 16.2%, 19세 미만에서 35.1%가 영양섭취 부족자이다.
특히 청소년이 심각한데, 이는 주 5일 이상 아침식사를 거르는 비율이 매우 높고(2019년 35.7%), 주 3회 이상 패스트푸드를 섭취하는 비율이 높은 것(주 3회 이상 패스트푸드 섭취 비율 25.5%)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소득수준이 낮은 계층에서 영양상태가 더 좋지 않다. 2019년 하위계층의 영양섭취 부족자 비율은 18.9%로 2011년 12.6%보다 크게 늘어났다. 그리고 잘못된 식습관으로 비만율이 높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비만율은 2016년 27.9%에서 2018년 31.8%로 높아지고 있는데, 소득수준이 낮을수록 비만율이 높다.
소득수준이 가장 낮은 1분위 구간에서 고도 비만율은 5.12%, 초고도 비만율은 0.70%로 나타나는 반면에 소득수준이 높은 19분위의 구간에서 고도 비만율은 3.93%, 초고도 비만율은 20분위 구간에서 0.15%로 나타나고 있다.
먹을거리 불평등으로 인한 먹을거리 취약계층의 건강권이 심각하게 침해받고 있다. 미국에서 공부할 때 슈퍼마켓에서 만난 비만 여성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녀는 자신의 몸무게를 이길 수 없어 휠체어에 의존해 식품을 구입하고 있었는데, 손에는 빈곤층에 지급되는 푸드 스탬프를 들고 있었다.
푸드 스탬프는 저소득층 등 취약계층에 대해 식료품 구입비를 지원하기 위한 바우처이다. 미국 전체 가구의 약 16%인 4,200만명이 푸드 스탬프를 받는다. 정크푸드와 잘못된 식습관이 가난한 그녀의 건강을 망치고 있었다. 미국이 우리의 미래가 되지 않기 바란다.
먹을거리 위기,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우리 국민은 심각한 먹을거리 위기에 처해 있다. 먹을거리의 대부분을 정체불명의 수입농산물에 의존하고 있고, 국내에서 생산되는 농산물도 반드시 건강하다고 할 수 없다. 좋지 않은 음식과 잘못된 식습관이 국민 건강을 해치고 있다. 특히 소득이 낮은 취약계층은 영양부족과 비만으로 고통받고 있다. 국민의 먹을거리 기본권을 보장하는 것은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의 가장 중요한 의무이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첫째, 먹을거리의 국내 공급력을 높여 식량안보를 확보하고 식량주권을 회복해야 한다. 세계무역기구(WTO) 체제하에 확대되는 농산물무역은 식량안보를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다. 국제농산물시장은 매우 취약한 구조를 지닌다. 농산물은 공산품과 달리 세계시장에서 거래되는 교역량의 비중이 매우 적은 전형적인 ‘엷은 시장(thin market)’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주식으로 하는 쌀의 경우 국제시장에서 거래되는 양은 전체 쌀 생산량의 5% 내외에 지나지 않는다. 세계 곡물시장은 기본적으로 공급자의 과점(寡占)시장이다. 곡물수출국은 소수인 반면에 수입국은 다수이기 때문이다. 주요 농산물에 대한 3대 수출국의 비중을 보면, 밀 60%, 사료곡물 70%, 쌀 65%, 콩 90% 이상을 차지한다.
우리는 식용 밀의 48%를 미국, 44%를 호주, 8%를 캐나다에서 100% 수입하고 있다(2018년). 이러한 곡물시장은 ADM, 벙기(Bunge), 카길(Cargil), 루이 드레퓌스(Louis Dreyfus) 등 소위 메이저 ‘ABCD’가 지배하고 있다.
곡물메이저가 지배하는 ‘엷은 시장’에서는 생산량이 조금만 줄어도 곡물가격이 폭등할 수밖에 없다. 세계가 주기적으로 식량위기를 겪는 이유다. 더욱이 기후위기로 인해 전문가들은 심각한 식량위기가 닥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우리나라 5,000만 국민의 건강을 곡물메이저에게 맡길 수 없다.
식량자급률을 높여야 한다. 정부도 그 필요성을 잘 알고 있지만 실천하지 않는다. 농식품부는 2013년 발표한 ‘농업·농촌 및 식품산업 발전계획’에서 2022년 식량자급률 목표를 60%, 곡물자급률 목표를 32%로 정했고, 2018년에는 그 목표치를 각각 55.4%, 27.3%로 낮췄으나 실제로는 이에 훨씬 미치지 못한다. 식량자급률 제고를 위한 비상한 노력이 필요하다.
먹을거리 기본권 보장받아야
둘째, 국민 누구나 먹을거리 기본권을 보장받아야 한다. ‘먹을거리 보장(food security)’이란 ‘모든 사람이 언제나 활동적이고 건강한 삶을 위해 충분하고 안전하며 영양 있는 먹을거리를 필요와 기호에 따라 물리적, 사회적, 경제적으로 접근 가능한 상태’를 말한다. 이를 위해서는 소득수준이 낮아 영양을 제대로 섭취하지 못하는 절대적 먹을거리 취약계층뿐 아니라, 인구구조(고령화) 및 가구구성의 변화(1인 가구의 증가)나 식생활 소비패턴의 변화(외식 및 패스트푸드), 잘못된 식습관(아침 결식) 등으로 인한 사회적 먹을거리 취약계층 모두를 대상으로 하는 먹을거리정책의 공공성을 강화해야 한다.
구체적으로는 국가와 지방자치단체가 학교급식 및 공공급식 등 먹을거리에 대한 공공조달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또한 취약계층을 대상으로 한 먹을거리 바우처 제도를 전면 확대 도입하고, 아동·학생·노인·장애인·청년·임산부 등 계층별 특성에 맞는 먹을거리 공급체계를 갖춰야 한다. 아울러 지역 내 먹을거리 기반 사회적 경제조직을 육성하여 먹을거리 기반 공동체를 활성화해야 한다.
셋째, 건강하고 안전한 먹을거리 시스템이 구축되기 위해서는 식생활 교육과 식문화 가치 확산이 중요하다. 먹을거리 기본권을 보장하는 것은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의 의무이지만 그것은 ‘먹을거리 시민(food citizen)’의 실천을 통해 실현된다.
먹을거리 시민이란 먹을거리에 대한 바른 의식을 갖고 무엇을 먹고 어떻게 생활하고 실천해야 할지를 아는 사람을 말한다. 먹을거리 시민을 위해서는 농업과 환경을 배려하는 식생태(食生態) 교육을 유치원과 초·중·고등학교의 교과과정에 의무화하고, 평생학습 차원에서 생애 전주기 별로 올바른 식생활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
넷째, 기후위기에 대응한 지속가능한 먹을거리 생산체계를 갖추기 위해서는 관행농업을 친환경 생태농업으로 전환해야 하고, 지역먹을거리 순환체계를 확립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농민의 공익기여직불을 대폭 확대해야 하고, 먹을거리의 생산-소비-폐기의 전 과정에서 지역순환성을 높여야 한다.
시장원리에만 맡길 수 없는 농산물의 특성을 고려하여 지역먹을거리 체계를 통해 생산자와 소비자의 관계유통을 확대하고, 친환경농업에 필요한 투입재를 지역에서 조달하고, 남은 음식이나 음식물 폐기물을 지역에서 자원화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국가 먹을거리 종합전략 수립해야
마지막으로 먹을거리 기본권을 보장하기 위한 국가 먹을거리 종합전략을 수립하고 이것을 법제화하고 구체적으로 실천하기 위해 먹을거리 기본법을 제정해야 한다. 법을 만드는 것도 그것을 실천하는 것도 정책 당국의 의지에 달려 있다. 대통령직속 농어업·농어촌특별위원회는 2020년 12월 ‘국가먹거리종합전략’(안)을 마련했으나, 농식품부는 지난 9월 ‘국가식량계획’이란 같은 듯 다른 이름으로 내용을 왜곡하고 축소했다.
‘국가식량계획’은 먹을거리에 관한 비전과 구체적 전략을 결여한 페이퍼워크에 지나지 않는다. 식량안보 강화를 내세우지만, 식량자급률(곡물자급률)에 관한 목표조차 제시하지 않았고, 농업인의 날 대통령이 언급한 밀과 콩에 대해서만 자급률을 2025년까지 각각 5%와 33%로 높인다는 목표를 제시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마저도 실현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농식품부는 ‘농업·농촌 및 식품산업 발전계획’에서 제시한 전체 식량자급률 및 품목별 자급률의 목표치를 한 번도 달성한 적이 없지만, 반성도 없고 책임도 지지 않는다. ‘전국먹거리연대’는 농식품부의 “‘국가식량계획’은 농특위에서 논의하여 마련한 ‘국가먹거리종합전략’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는 반쪽짜리 계획에 불과하다”고 비판하고 “국민 먹거리기본권 보장을 위한 먹거리기본법을 제정하라”고 촉구했다.
기후위기는 농업위기와 먹을거리위기를 전면화하고 있다. 식량주권을 지키고 국민의 먹을거리 기본권을 보장하는 것은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책임지는 국가의 기본적 의무다.
출처 : 한국농정신문 '소빈 박진도의 가보세' 12월 5일자 보도
http://www.ikpnews.net/news/articleView.html?idxno=46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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