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유럽은 어떻게 '성장·복지·지역균형발전' 모두 잡았나? | 박 경 지역재단 이사장, 목원대 명예교수
- 작성일2021/12/27 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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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지리학자들의 시선] 장소기반 혁신전략과 지역 기여형 대학 육성해야
| 박 경 지역재단 이사장, 목원대 명예교수
우리나라의 수도권 인구가 올해 전체 인구의 절반을 넘었다. 이대로라면 지방은 청년인구의 유출과 고령화로 소멸할 거라는 위기의 목소리가 높다. 이런 중앙과 지방간의 지역 간 격차는 2000년대 이후 글로벌화, 지식기반경제로의 진전으로 더욱 확대됐다. 더불어 2000년대 이후 우리나라 경제성장은 잠재성장률이 3%도 안 되는 저성장 기조에 들어섰다.
반면에 한국의 상위 10% 집단의 소득집중도는 44.6%로 신자유주의 종주국이라는 미국과 유사하다(영국, 독일 등은 32~37%). 복지지출도 확대되어 왔지만 아직 선진국을 따라잡기에 멀었다. 저성장과 저복지, 지역 간 불균등의 악순환이 우리의 현재 모습이며, 향후 확대될 우려가 크다.
그런데 북유럽국가는 2008년 세계금융위기를 성공적으로 극복해 낸 이후, 세계 최상위 수준의 혁신력과 고른 분배 및 지역균형을 달성하고 있다. 최근 스웨덴, 핀란드는 스타트업의 요람이라고 불리며, 행복도도 가장 높고 지역 간 격차도 가장 낮다.
전통 경제학에서 성장과 분배는 상충관계에 있다고 했지만, 북유럽이 성장과 복지, 지역균형발전의 세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은 비결은 무엇인가?
북유럽 모델의 재발견
그간 많은 논자는 글로벌화, ICT화에 적합한 경제시스템은 영·미형의 신자유주의 경제시스템이라고 봤다. 이들은 규제 완화와 세계화의 추세 아래 북유럽과 같은 고부담을 강요하는 나라에서는 노동의욕을 잃거나 인재와 기업이 해외로 유출될 것으로 예측했다. 실제로 1990년대 초 북유럽은 복지국가 위기를 겪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예측은 빗나갔다. 1990년대 초의 복지국가 위기와 2000년대 초의 ICT 버블경제 침체를 비교적 성공적으로 극복하고 난 이후 북유럽은 경제성장률, 양호한 고용률, 낮은 인플레이션율 등 여러 주요 경제지표에서 유럽 최상위권의 성적을 기록해왔다.
세계지적재산기구가 발표하는 세계혁신지수(Global Innovation Index, 2021)을 보면, 세계에서 가장 혁신국가로 1위가 스위스, 2위가 스웨덴, 3위가 미국이며, 핀란드, 덴마크도 각각 7위와 9위에 올라있다. 즉, 세계 혁신을 주도하는 두 그룹을 꼽으라면 미국과 북유럽이라고 할 수 있다.
북유럽은 미국의 애플, 구글, 페이스북처럼 독보적 지위의 유명한 ICT업체가 두드러지지 않지만, 리눅스, 스카이프, 스포티파이(이상 스웨덴), 로비오, 슈퍼셀(이상 핀란드)과 같이 혁신적인 아이디어나 기술을 바탕으로 행정, 의료, 교육 분야를 비롯하여 정보통신기술(ICT)의 응용분야에서 높은 국제경쟁력을 갖고 있는 기업이 많다.
북유럽은 균형과 성장, 혁신을 어떻게 동시에 달성했는가
노벨경제학자인 스티글리츠는 '선도자와 추종자: 혁신경제학과 북유럽 모델의 시사점'(Stiglitz, 2014)이라는 논문에서, 오늘날과 같은 지식기반경제에서는 미국 모델보다 오히려 북유럽 모델이 우위에 있다고 한다. 급진적 혁신은 개인이나 기업이 부담하기에 위험이 커서, 이를 공공부문이 부담해 주는 북유럽식 모델이 더 장점이 있다는 것이다.
북유럽 국가는 △질 높은 숙련과 교육, △혁신을 촉진하기 위한 적극적인 공공 정책 △잘 설계된 안전망(급진적 혁신의 위험을 감수하게 하고, 특히 실업보험은 근로자 고용을 쉽게 하여 위험을 감수하는 기업가에게 유리)을 갖췄다는 것이다.
최근에 경제지리학자들은 혁신을 위해서는 개인의 노력이나 시장의 금전적 인센티브 보다 혁신에 유리한 총체적인 사회경제적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다.
핀란드는 1990년대에 OECD 국가 중 가장 먼저 국가혁신체제(NIS: National Innovation Systems)개념을 도입하였으며, 스웨덴도 2001년 VINNOVA(기술혁신청)을 설립하면서 혁신시스템(innovation system) 개념을 이른 시기부터 정책에 도입했다.
주목할 점은 북유럽이 국가혁신체제 정책을 도입할 때 처음부터 지역기반, 장소기반(place based) 혁신체제 구축을 채택했다는 점이다. OECD는 이런 점에서 2008년 이후 북유럽국가의 선전은 헬싱키나 스톡홀름과 같은 수도권 대도시 외에 지방의 도시를 산업과 경제 발전 정책의 핵심 지역으로 선정 및 운영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이는 수도권과 대기업이 주도하고, 구상기능은 수도권에, 지방은 분공장 형태의 생산기지에 머무는 한국의 국가혁신체제가 가지는 한계점과 대조를 이룬다.
예를 들어, 핀란드의 대표적인 클러스터 정책으로서 전문특화센터 구축전략(Centres of Expertise, 1994~2013)은 수도 헬싱키 이외에 8개 대도시권에 각각 전문특화분야와 민간협력체제를 구축하는 장소기반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
디지털 산업은 수도인 헬싱키(Helsinki)가, 에너지 기술은 바사(Vaasa), 헬스·바이오는 투루쿠(Turku), 건강 웰빙은 쿠오피아(Kuopio), 오울루(Oulu), 지능형 기계는 탐페레(Tampere), 나노 기술은 이위베스퀼레(Jyväskylä) 등이 맡는 식이며, 이 도시들의 특화발전과 도시 간 연계협력이 핀란드 국가 전체의 산업혁신과 신산업 창출을 견인하도록 했다.
스웨덴의 VINNOVA(기술혁신청)의 대표적 혁신 프로그램인 '강한 연구혁신환경(strong R&I milieus)' 프로그램도, 지역기반 혁신 정책의 사례이다. 이름에서 보듯이 연구개발투자(R&D)보다는, 혁신(R&I)을 강조하고 혁신환경과 주체 간의 산학관(Triple Helix) 협력을 장려했다.
이 정책은 지역 간의 경쟁 공모제를 채택했는데, 혁신기반을 잘 갖춘 스톡홀름이 오히려 탈락하고, 비록 혁신자원은 부족하지만 산학관 협력 의지가 잘 갖춰진 변방이 먼저 선정되어 세간의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이런 배경으로 2000년대 이후 북유럽국가의 지역 간 격차는, 스톡홀름이나 헬싱키의 수도 집중이 일부 없지는 않지만, 여전히 30여개 OECD 국가 중 가장 낮은 수준을 기록하고 있다.
북유럽의 지역 간 격차가 낮은 이유는 잘 설계된 장소기반 혁신정책 이외에, 광범위한 복지 모델, 조율된 임금 교섭(coordinated wage bargaining) 및 국가의 지역균형발전에 대한 명확한 목표 설정 덕분이다.
북유럽 지역발전정책은 효율적이라고 정평이 나 있다. 대부분의 국가 재정이 의료나 사회복지 등에 쓰이고, 혁신 및 지역산업발전을 위한 재원은 매우 제한적인 상황에서 '혁신정책 자체를 혁신'하여 철저히 효율성을 추구했던 덕분이었다.
선별적인 보조금이나 조세 혜택 등의 지원방식이 아닌 산업 인프라, 교육체제, 산학네트워크, 기업과 대학간 상호협력 등의 혁신환경 조정에 초점을 뒀다. 그리고 처음부터 글로벌 경쟁을 중시했다.
특히 지역발전의 축으로서 대학의 역할이 눈에 띈다. 1970년대~1980년대 대학의 지방분산과 신규 설립, 정부의 적극적 지원은 지방균형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 핀란드의 북방 접경 지역인 오울루가 정보통신산업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계기도 오울루 대학과 같은 질 좋은 대학이 있었기 때문이다.
핀란드 교육부 장관을 했던 야아꼬 눔미넨(Jaako Numminen)은 '집 근처에 훌륭한 학교' 즉, 어디에 살든 대학교육의 평등한 기회를 보장해줌으로써, 어디서라도 필요한 인재를 구할 수 있었고, 지방도 과학과 학문적으로 폭넓은 국제 관계를 구축할 수 있었으며, 정부 R&D투자를 효과적으로 받을 수 있는 그릇을 갖출 수 있었다고 말한다.
이 덕분에 노키아와 같은 대기업도 인재를 찾아 오울루, 탐페레와 같은 지방에 연구소를 설립하고 고급 일자리를 만들었다.
2000년대 중반에 잘 알려진 핀란드의 대학통합(예를 들어 헬싱키공과대학, 헬싱키경제대학 그리고 헬싱키예술디자인 대학의 알토대학으로 통합)은 '개방형 혁신 플랫폼 (open innovation platform)' 시대에 다학제 융합형 신산업 창출을 선도하는 세계적 대학의 모델을 키워내려는 또 다른 시도이다.
북유럽 모델의 시사점
북유럽과 같이 인구 500만(핀란드, 덴마크)~1000만(스웨덴)의 소국경제가 글로벌 경쟁에 맞서 지방분산과 균형발전을 중시한다면 장점보다 대가가 클 수 있다. 크루그만(P. Krugman)은 오늘날 세계에서 성장을 주도하는 동력은 대도시와 도시집적의 이점(외부효과)이라고 한다. 북유럽의 분산경제는 이런 효과를 누리기 어려울 수 있다.
그러나 북유럽은 1990년대 후반 이후 2000년대를 통해 복지국가 위기와 대기업 의존체제를 극복하고 지식기반경제로의 원활하게 이행했을 뿐만 아니라, 벤처기업들의 활발한 창업과 지역 간 고른 발전을 이룩한 점에서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준다.
현재 우리나라는 자동차, ICT라는 좁은 산업기반과 대기업에 의존하는 추격형(catch-up) 경제에서 혁신을 기반으로 한 탈 추격형(post catch-up)경제로 전환과 함께 분배와 지역균형을 동시에 달성해야 할 과제를 안고 있다.
최근 'R&D 투자 역설', '지역산업진흥정책의 역설'이란 말이 종종 들린다. 전자는 한국 R&D 수준이 세계 최고이나 성과는 저조(특히 산학협력, 사업화, 유니콘 스타트 업 육성 등)하다는 것이고, 후자는 1998년 외환위기 이후 지금까지 약 10조 원이 넘는 재원을 지역산업 육성에 지원하였으나, 변변한 산업 하나 창출하지 못하고 성과가 저조하다는 이야기다.
북유럽의 지역발전 경험 가운데, 특히 대학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이 인상깊다. 스웨덴 룬드(Lund) 대학의 에릭슨(Per Ericsson) 전 총장은 종전에는 교수들이 현실에 안주하고 주로 '해달라'했지만, 현재는 대학이 기업과 지역사회를 위해 '무엇을 해줘야 하는가'로 자세 변화했다고 말한다.
우리나라는 대학보다 산업육성에 더 초점을 둔 클러스터 정책을 그간 추구해왔다. 좋은 대학이 없으면 기업이 지역에 내려가지 않는다는 것을 북유럽의 경험에서 배워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도 진정한 생태계와 네트워크가 작동하는 지역경제를 만들어야 한다. 이러기 위해서는 혁신정책과 대학정책을 전면적으로 개혁해야 할 시점이다.
출처: 프레시안 12월 24일 기고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1122216011148557#0DK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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